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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활동가닷넷] 15회 인권활동가 대회 – 제주 4·3 70주년 인권으로 역사를 여행하다
    • 작성일
    • 2018.03.27
  • 15회 인권활동가 대회 
    '제주 4·3 70주년 인권으로 역사를 여행하다'


    남웅(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제주 4·3을 몸으로 새기고 인권과 변화를 이야기하다

    2018년은 70이라는 숫자가 여러 갈래로 새겨진다.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이자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점령 70년이다. 그리고 제주 4·3 70년이기도 하다. 2차 대전이 종식되고 좌우 대립이 극에 달하며 대리전이라 평가되는 6·25전쟁이 발발하기까지 세계사에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다면 정리된 역사를 살피면 된다. 하지만 당대에 살았던 이들이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경로로 집단의 감정을 만들어냈으며, 그 정동은 무엇인가를 추론하는 것은 나로선 상상조차 어렵다. 그동안 변화를 위해 어떤 투쟁이 있었고 무고한 희생이 있었으며,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를 찾고 읽는 것은 지금을 살고 있는 이들의 책무이기도 하다.

    몇 편의 4·3 연구 자료와 몇 년 전 찾은 4·3기념관의 전시물, 몇 년 전 개봉한 영화들이 그간 나름 찾아보았던 4·3의 자료들이다. 텍스트로 접해온 사건은 경험보다는 감각적 데이터로 남는다. 무엇보다 제주를 관광지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인지 인권활동가대회를 제주에서 한다는 얘기에 반가움과 피로가 엄습했다, 4·3을 제주에서 이야기하는 것, 다른 이도 아니고 인권활동가들과 4.3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기대와 부담을 동시에 수반한다. 그럼에도 4·3이었기에 가야했다고 생각한 건 적어도 인권활동가라는 이름이 부여한 사명만은 아니었을 것 같다.


    ▲ 섯알오름 학살터

    4·3은 일제치하부터 6·25전쟁 이후에 이르는 시간을 아우른다. 사건은 좌우이념대립과 이승만 정부의 명분을 위한 좌파 색출, 그리고 그 가운데 일어난 민중학살을 제주의 지정학적 장소에 함축한다. 복잡한 맥락은 4·3을 무엇으로도 호명할 수 없도록 만든다. 사건의 맥락이 방대한 만큼 4·3유적은 일제 강점기 비행장부터 군사시설, 학살터와 묘지, 위령비, 은신처와 피해생존자 삶터까지 두꺼운 층위를 아우른다. 제주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수식들이 무슨 역사를 숨기고 있는지, 기록과 흔적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찾아볼 것을 요청한다.

    4·3답사를 여러 경로로 간다고 할 때 큰넓궤가 포함된 코스를 선택했다. 4·3을 보다 가깝게 느끼고 싶다는 생각, 보다 정확히는 몸으로 감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가 들었다. 한편으로는 희생자들의 이야기로 가득한 사건 한가운데 생존을 위한 장소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정원에 제한을 둔 사전신청 코스라는 희소성 역시 판단에 동기로 작용했다. 

    큰넓궤는 4·3당시 중산간마을 초토화작전이 시행되어 마을주민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과정에 주민들이 토벌대들을 피해 두 달 동안 몸을 숨기고 살았던 곳이다. 120여 명의 주민들이 굴에서 생활할 만큼 넓은 굴이라고 한다. 영화 <지슬>을 촬영한 장소로도 기록되어 있다. 몸을 숨겨야 했던 만큼 좁은 통로와 절벽은 방문객을 쉽게 반기지 않는다. 낮은 포복으로 흘러내린 용암굴을 기어서 통과해야했던 탓에 팔꿈치와 무릎이 까지고 우비가 갈기갈기 찢겼다. 노인과 어린이들은 굴속에서 계속 생활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핸드폰으로 조명을 비추며 한줄기 빛도 없는 어둠을 헤쳤다. 동행한 활동가들이 없었더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단내가 날 정도로 헤치고 들어가야 겨우 나온 넓은 공간에서 활동가들은 가이드 선생님의 제안에 따라 모든 조명을 끄고 침묵했다. 바닥이 날카로워 몸 하나 편히 뉠 수 없는 공간, 빛도 차단된 공간을 우리는 몸을 구기며 겨우 들어갔다 나왔지만, 두 달 동안 죽음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은 불편과 침묵, 어둠에 익숙해져야 했을 것이다. 

      
    ▲ 동광리 큰넓궤

    큰넓궤를 나오고 나니 하루 전의 호우경보가 무색하게 거짓말처럼 하늘이 갰다. 그 고생을 하고 나와서인지 우리는 고난을 함께한 공동체의 눈빛을 잠시나마 주고받은 것 같기도 하다. 내려오는 길에 한라산이 완만한 실루엣을 드러냈다. 제주도는 공항부터 한라산의 아름다운 실루엣이 타지인의 시야를 포근하게 압도한다. 4·3의 그림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한라산은 관광의 성지 제주의 상징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미 육지에 익숙한 나로서 제주는 하나의 변방이자 이국적 장소인 것이다. 두 달 동안 빛을 보지 못한 이들이 시린 눈을 비비고 바라본 산은 내 앞의 피사체와 다른 모습이었을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의 공동체는 두 달 동안 지내다 토벌대에 발각되어 굴을 나와 무작정 보이는 한라산을 보고 올라갔다고 한다. 죽음을 피해 제주도에 갈 수 있는 한라산은 선명한 만큼 아득하고, 깊은 만큼 폭력을 침묵으로 덮는다. 

    관광지의 이름을 한 겹 벗겨내면 역사의 흔적들이 고개를 든다. 송악산에서 보이는 산방산과 한라산의 절경 뒤꼍에는 전쟁 말기 일제가 자폭보트를 보관하기 위해 절벽을 뚫었던 흔적과 고사포 진지가 터로 남아있다. 너른 벌판은 일제 강점기 비행장이었다. 아름다운 관광지 뒤에 지배와 폭력, 고통과 슬픔으로 새겨진 시간들이 포개져 있다.

    고립된 섬에서 깊은 상처는 침묵이 되어 집단적으로 잊히기도 한다. 기억은 금기가 되고, 지배이데올로기의 체제를 답습해야 겨우 인정받기도 한다. 망각은 폭력 속에 개별성을 삭제 당한 덩어리의 군집을 없는 존재로 취급한다. 4·3은 20년 전만해도 언급이 금지된 사건이었다. 4·3특별법이 만들어진 지금도 제주도의 4·3희생자들은 국가의 이름을 빌어 애도 되고, 무궁화와 같은 국가 표식으로 장식된다. 그럼에도 기억을 실천하는 노력은 익명의 군집으로부터 개별의 이름을, 적어도 이름이 부재하는 자리를 발굴한다. 학살을 피해 생존한 누군가는 다시 굴에 들어가 시신을 수습하며 이들의 이름과 신변정보를 메모해 두었다. 이유도 모르고 잡혀 트럭에 몸을 실은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옷가지들을 하나씩 흘려 자신의 마지막 길을 남겼다고 한다. 4·3 피해생존자였던 무명천할머니 진아영님의 삶터에는 유품과 할머니를 기리는 문구와 수놓은 서화들이 보관되어 있다. 총알에 턱을 잃은 얼굴은 몸소 역사를 증언한다. 하지만 남겨지지 않은 이름을 애도하는 실천들도 있다.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100구가 넘는 유해들은 한데 엉겨 붙어 신원을 알 수 없어 발굴 이후 한데 모아 묻었다. 한날한시에 죽은 이들을 한데 묻어 그 후손들은 한 자손이라 하여 백조일손(百祖一孫)의 묘라고 부르는 장소성은 이름이 삭제된 자리에 미래의 이름들을 한데 묶어 기억의 공동체를 배태한다. 고통을 기억하는 행위는 다시 제주의 장소들로 연결된다. 제주는 역사를 이미 증언해오고 있었다. 

    답사는 역사를 기억하는 이들의 노력으로 가능했다. 인권활동가라는 이름 덕분에 4·3의 장소들을 부러 찾는 노고를 덜고 접근이 어려운 장소도 찾을 수 있었다. 4·3의 무게를 여행으로 가공해낸 제주다크투어를 알게 된 것도 나름의 소득이다. 몸을 움직여 보고 감각하는 순례의 과정은 현실을 끌어들여 장소와 조우시킨다. 그것이 현실을 보는 관점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는 순례자의 몫이다. 



    인권활동가대회는 전국 각지에서 현장대응과 이슈 파이팅으로 몸을 불사르고 있는 인권활동가들의 쉼과 만남을 위해 기획된 자리이다. 하지만 이만큼 하드캐리한 일정도 없다. 쉼 없는 일정 위에 활동가의 쉼을 말한다는 자조는 이제 유머가 되었다. 참여한 활동가들은 몸 던져 준비한 활동가들의 노고를 알기에 특별한 사안이 아니라면 정색하고 불평을 올리지 않는다. 관광지 위에 포개어진 답사는 심적으로도 가볍지 않았다. 몸으로 배운 4·3인 만큼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는 농담은 허풍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공간은 무엇인지, 삶을 기억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나의 몸을 구획하고 이름을 부여하는 사회는 나를 어떻게 기록하고 삭제하는가를 새삼 생각한 시간들이었다. 이런 고민들은 결국 사회의 변화와 변혁운동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생각의 흐름은 인권활동가대회 본토론에서 류은숙 선생님이 이야기한 ‘언젠가는...을 상상하는 힘’에 가 닿고, 정정훈 선생님이 이야기한 ‘변혁을 꿈꾸고 만들어낼 수 있는 인권운동’도 떠오르게 한다.

    그런 점에 인권활동가대회에 성소수자 활동가들의 참여가 늘어난 것은 인권운동의 성과이기도 하다. 편견과 혐오 속에 오명을 가졌던 성소수자들이 제 언어를 만들고 실천하는 과정은 인간의 자격에 기준을 두고 타인을 판단하는 사회규범에 맞서 변화를 촉구해온 인권운동의 궤적 위에 있다. 몸을 재단하고 언어를 구획하는 체제에 일치하지 않는 이들은 침묵과 순응의 강요를 깨며 몸을 드러내고 자신이 설 수 있는 자리를 요구한다. 그런 점에 이번 대회에 성소수자 활동가들이 성중립화장실과 성중립방 등 다양한 성별정체성과 성적지향을 고려하지 않은 점을 지적한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이를 빠듯한 실무의 한계로 보지 않으면 좋겠다. 이는 성소수자 뿐 아니라 장애인 접근권과 채식에 대한 논의에도 가 닿는다. 불편함의 표현은 곧 공간의 체제를 흔들고 틈을 벌리며 변화를 도모하는 몸짓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더욱이 이는 4·3을 기억하고, 희생된 이들의 몸을 성찰하며 국가폭력을 비판적으로 읽는 작업과도 상응하지 않는가. 인권운동이 공간의 체제에 개입하고 몸에 각인된 규범의 관성을 흔들며 말해지지 않은 언어를 발화하는 행위라면, 인권활동가대회는 다른 장소보다도 불편함을 인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타인의 삶에 귀기울이고 변화를 모색하는 장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불편함의 호소를 단지 개인의 불만으로 읽지 않고 인권운동사회가 함께 논의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기를 바라며, 논의와 실천의 장에 함께 하며 인권운동을 만들어가면 좋겠다.